한열음 작가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

05회. 열 살, 물살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트럭이 오지 않았다. 새로 이사 갈 집이 바로 주인집이었기 때문에 짐만 날랐다. 주인집이 시내로 이사를 하면서 안채를 우리에게 내었다. 우리 형제들은 처음으로 부모님과 따로 방을 쓰게 되었다. 아랫방은 부모님, 그 위쪽 미닫이문이 달린 윗방은 우리 남매 방이 되었다. 가장 큰 사랑방은 그냥 빈방으로 두었다. 사랑방은 아궁이가 부엌이 아니라 뒤꼍 쪽에 따로 나 있어 웬만해선 불을 때지 않아서 냉골이었다. 두 개의 방만으로도 달리기할 만큼 넓었다. 게다가 두 방을 합친 크기만큼의 마루가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창꼬방’은 진짜 창고가 되었다.

아버지는 마당 가에 나무 기둥을 여러 개 세우고 철조망을 둘러 칸을 나눴다.

“널른 마당을 놀리서야 쓰겄어?”

양철 지붕을 얹으니 그럴싸한 개집이 완성됐다. 엄마는 늘 장에 내다 팔 강아지를 사기 위해 강아지가 태어났다는 소문을 쫓아 시골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우리 집에서도 직접 개를 키워 그 새끼를 내다 팔 거라고 했다. 엄마는 장에 내다 팔 강아지를 사서 그중에 가장 튼튼하게 생긴 ‘멍청이 도사견’ 두 마리를 데려왔다.

“엄마, 갱아지가 귀엽기만 헌디 왜 멍청이, 멍청이 그리싼데?”

“야들이 머리가 겁나게 나쁜 게 글지. 을매나 멍청허냐믄, 지 새끼를 나 놓고는 깔어 뭉개서 죽어 나가도 몰르고 밥만 처먹는다고 안 허냐. 긍게 낭중에 야들이 커서 새끼를 낳거들랑 느덜이 수시로 잘 디리다 보야써.”

“아, 그리믄 똑똑헌 놈들로다가 델꼬올 일이지, 멋 헐라고 이런 멍청헌 애들을 델꼬 왔는디?”

“아 그야, 야들이 새끼를 줄줄이 많이 난 게 글지. 한 번에 열 마리도 넘게 난당게. 금방금방 크기도 잘 크고.”

“아, 그려? 우야당간 나는 야들이 이쁘기만 허고만. 걱정허들 말어, 나랑 진주가 새끼 나믄 잘 지켜줄랑게.”

열 살 기념 선물처럼 진달래를 일등으로 해서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났다. 나는 학교 가는 길에 손에 닿는 대로 꽃을 꺾어 선생님 책상 위에 있는 꽃병에 꽂았다. 진달래가 지면 이어달리기라도 하듯 또 다른 꽃들이 계속해서 피었기 때문에 꽃병에 꽃이 떨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들녘에는 논마다 물이 가득 들어차 실바람만 불어도 논 전체가 부드럽게 일렁였다.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논에는 파란 하늘과 솜털 구름이 바람이 부는 쪽으로 흘렀고 새들이 빠르게 헤엄쳐 다녔다.

일요일 아침에 우리는 아버지를 따라 못자리 논에 가서 모 떼기를 해 왔다. 작년까지 모내기에서 못줄만 잡았던 내게 모를 심을 자격이 주어졌다. 열 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못줄을 잡을 사람이 없자 아버지는 간격을 가늠한 다음 못줄이 감긴 굵은 나무 막대를 땅에 푹 꽂았다. 워낙 조각 논들이라 못줄은 애초에 잡을 필요도 없었던 거였다. 나는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왼손에 못단을 잡고 오른손으로 네댓 포기씩을 떼어 검지와 중지, 약지를 쫙 펴고 무른 땅에 꽂았다. 어른들과 함께 모를 심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손가락을 따라 쑥쑥 심긴 모들이 안 넘어지고 제자리에 서서 바람에 살랑거리는 게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니었다.

“야야, 너 장딴지에 끄무락지 붙었당게.”

작은오빠가 내 다리를 보며 놀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종아리에 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를 떼어 아버지처럼 손가락으로 튕겼다. 다리가 따끔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흙탕물로 한번 쓱 씻어내고는 다시 허리를 굽히고 모를 심었다. 열 살씩이나 되었는데 이 정도 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흑백 TV로 뉴스를 보았다. 서울 여의도에 63층이나 하는 빌딩이 건설되었다고 했다. 63층이 얼마나 높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63층 높이에서도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비행기가 날아가다 부딪히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63층에 있는 내 방에서 잠을 자다가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논에 심은 벼들이 제법 키가 자라 논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짙푸른 잎이 빽빽해졌다. 건조한 바람이 며칠째 계속 불어 어른들은 논바닥이 마를까 근심이었다. 아버지는 교회에 가거든 비를 내려주십사고 기도하라고 했다.

도시에서 전근을 온 담임 선생님이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겁을 줬다. 나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얼마 전부터 경민이네 가족을 따라 일요일이면 산을 넘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명령대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다만, 아버지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우리 아버지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느님이 안 들어줄 게 뻔했다. 교회 선생님 말이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항상 들어주신다고 하더니 정말로 며칠 안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비가 내려도 너무 무섭게 내렸다.

“야들아, 후딱 인나야 쓰겄다.”

밤중에 아버지가 우리 남매를 깨웠다. 아버지는 몸에 비닐을 감고 손전등을 든 채로 토방에 서 있었다. 우리는 벼락같은 아버지 소리에 놀라 잠이 덜 깬 눈을 하고서 주섬주섬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골돔 논두렁이 다 무너져 버맀으야. 안 그리도 물이 넘치겄다 싶어가꼬 가봤드만…….”

우리는 엄마가 내주는 두루마리 비닐을 풀어서 몸에 둘렀다. 아버지를 따라 골돔에 가보니 논둑 곳곳이 내려앉아 물이 흘러넘쳤다. 그대로 두면 벼까지 다 쓸려갈 판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큰 돌들을 주워다 무너진 논둑에 쑤셔 박고 돌 사이에 풀과 흙을 채워 다졌다. 논둑 옆으로 흐르는 개울 반대편까지 삽으로 물길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 논 쪽으로 물이 더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늘엔 별 하나 뜨지 않아 눈앞은 깜깜했고 성난 빗줄기는 어디서고 내 몸을 때렸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손전등을 따라 빗물과 사투를 벌였다. 잠깐씩 손전등 불빛에 드러난 물줄기는 용의 꼬리라도 꿈틀대는 듯 요란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다시 논둑이 무너질까, 그래서 웃자란 벼들이 다 떠내려갈까, 한숨을 쉬었고 우리는 우리대로 학교 갈 일이 걱정되어 잠을 설쳤다.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책가방을 챙겼다. 몸에 비닐을 칭칭 감은 아이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들어섰다.

“비가 이르케 많이 내맀싸는디 어찌자고 학교서 전화가 안 온다냐잉.”

정록이었다. 사실 내가 아침을 다 먹고도 늦장을 부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거나 폭설로 산사태 위험이 있는 날엔 학교에서 이장님 집에 전화해 아이들 등교를 말류하곤 했다. 이장님 집에는 학생이 없었지만, 능바우에서 전화가 있는 유일한 집이었기 때문에 이장님이 전화를 받아 방송을 해줬다. 그럼 이장님 집 마당 감나무에 매달린 확성기를 타고 소리가 퍼져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었다. 새벽부터 내내 기다렸건만 이장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히봐도 소농리는 비가 별로 안 오는 모양이여. 아 긍게 몰르고 있는 것 아니겄냐잉?”

누군가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럴듯했다. 어쨌거나 학교 허락 없이 우리가 단체로 결석할 수는 없었다. 가방이 젖지 않도록 몸에 비닐을 꼼꼼하게 두른 다음 고무신을 챙겨 신고 길을 나섰다. 동네 입구 쪽은 길이 꽤 넓어서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앞으로 걸어갈수록 산을 타고 내려온 물줄기들이 좁은 길에 모여들어 점점 무서운 속도로 흘렀다. 급기야는 빗소리보다 물 흐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흙탕물은 속이 보이지 않아 더 겁이 났다.

“야야, 아무리도 안 되겄는디, 걍 집이 돌아가얄 거 같어. 이르다 복당골 지나믄 우덜 다 떠널러 가겄어.”

6학년 지용 오빠의 말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도 대부분 동의했다. 나도 이미 넘치는 물 때문에 바지는 물론이고 속옷까지 몽땅 젖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대로 집에 가자니 지게 작대기가 부러지게 또 아버지한테 맞을 것만 같아서 쉽게 그러자고 할 수도 없었다. 작년에 동네 애들 앞에서 개처럼 매타작을 당한 후 나는 수시로 꿈속에서도 매를 맞곤 했다.

“난 죽으나 사나 학교에 갈 거여. 어치피 떠널러 가다 물에 빠지 죽으나 아버지한티 맞어 죽으나 매한가지여. 아니, 물에 빠지 죽는 편이 허빼 낫겄어. 암만!”

빗소리에 섞여 안 들릴까봐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히도 이건 아닌 거 같어. 우리도 집이 가자. 민주야, 아부지도 이르케 비가 많이 와서 떠널러 갈 거 같어서 도로 왔다고믄 별말 없을 거여, 안 그냐. 나는 도로 갈 참여.”

작은오빠가 나를 설득했다. 이미 아이들 몇 명은 더 위험해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면서 왔던 길로 몸을 틀었다. 정록이, 경민이도 그 무리 끝에 등을 보이고 첨벙첨벙 걸었다. 지용 오빠와 작은오빠까지 나를 설득하다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포기하고 아이들 뒤를 따라갔다. 작은오빠까지 눈에서 사라지자 덜컥 겁이 났다.

빗줄기가 더 사나워졌고 길에 고인 물살도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혔다. 더 시끄럽게 울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정도 빗소리면 하느님한테도 내 울음소리가 안 들릴 게 뻔했다. 무엇보다 남은 것은 내 선택이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몸에 둘렀던 비닐을 벗어서 가방을 여러 겹으로 꼼꼼하게 여몄다. 틈이 없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빗발이 거세 어려웠다. 가방 색으로 보아 아직 젖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단단히 감싼 가방을 우산처럼 머리에 이고 다시 학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었다. 물속에서 발이 미끄러져 몇 번 넘어지긴 했지만 다 젖은 몸이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복당골을 지나고 큰 바윗길을 지나고 공동묘지를 지나 학교가 저만치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고비가 남았다. 원래 징검다리로 건너던 개울은 불어난 물이 주변 논을 삼키는 중이었다. 가슴이 벌렁거려 한참을 서서 숨을 골랐다. 쉽사리 용기가 안 났다. 머리에 인 가방이 혹시 물에 빠질까, 손을 더 높이 들고 물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평소 장딴지 높이에서 찰랑대던 개울물이 허리를 넘기나 싶더니 이내 가슴께로 차올랐고 곧장 어깨에 닿았다. 빠른 물살에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가는 그대로 휩쓸려 버릴지도 몰랐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나 좀 살려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을 계속 반복했다. 순간, 발을 삐끗해 머리가 물속으로 잠겼지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물 밖으로 밀어냈다. 충격으로 몸이 휘청대는 바람에 두어 번 더 자맥질을 했다. 하지만 용케도 빗소리, 물소리 사이로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었는지, 나는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개울을 건넜다.

비닐에 감싼 가방을 끌어안고 논두렁에 주저앉아 성 난 물살을 바라보았다. 동네 아이들 앞에서 개처럼 매질을 당하는 것과 목숨을 걸고 개울을 건너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이 나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둘 다 어려운 문제였다. 개울을 건너다 다쳤는지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내 빗물에 섞여 묽어졌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어느 틈으로 물이 들어갔는지 가방 한쪽이 물에 젖어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엔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쏟아지는 빗물을 계속 받아내는 중이었다. 소농리에도 능바우 못지않게 큰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았기에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다. 교실 문 여는 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내 몸에서 흐른 물이 교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선생님이 숙직실로 수건을 가지러 간 사이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다. 1교시인 줄 알았는데 2교시 마치는 종이라고 했다. 완전한 지각이었지만 결석은 아니었다.

“능암 애들 아무도 안 오길래, 못 오나 했는데 어떻게 온 거냐? 안 그래도 학교에서 능암 이장님 집에 전화가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

빗줄기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기세가 꺾였다. 깍두기는 교과서를 붉게 물들이느라 국물이 다 빠져나가 맛이 맹탕이었다. 가방이 젖을 것만 걱정했지, 도시락은 차마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밥에도 비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았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이장 아저씨네 집에 전화가 되어 선생님이 동네에 연락을 넣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혼자 집에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젖은 옷을 입고 계속 앉아 있었더니 몸에서 쉰내가 진동했다. 6교시까지 수업을 다 듣고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능바우로 가는 길은 어느새 물이 다 빠져 질척거릴 뿐이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은 꿈인 양 시치미를 떼는 하늘이 얄미웠다.

오빠 종아리에는 매질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동생을 사지에 내팽개치고 왔다고 아버지한테 한차례 두들겨 맞았단다. 작은오빠가 계속 내 눈치를 보는 바람에 나는 맘 놓고 오빠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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