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11회. 나의 방전구를 눈에 담았다. 유리알이 다소곳하게 감싸고 있는 필라멘트가 자취방을 오롯이 혼자 다 차지하고 누운 나랑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 같았다. 웃음이 터졌다. 처음이었다. 내 방을 가져보는 게. 드러누워 몸을 굴리면 채 두 바퀴도 못 도는, 세상이 나에게 내어 준, 나의 방 한 칸. 환장하게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10회. 읍내리 방 한 칸중산 버스터미널에서 서문약국을 끼고 쭉 따라가다 태권도장 뒷길로 접어들어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 굽이굽이 담벼락 깊숙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파란 대문. 그 집 뒤로는 층지지 않은 논들이 중산고등학교 너머까지 펼쳐졌다.녹슬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파란 대문 위로 둥그런 지지대를 따라 말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 09회. 바나나의 쓴맛월요일 운동장 조회 시간에는 교장 선생님의 특별한 발표가 있었다.“이제 우리 학교 어린이들도 도시의 아이들처럼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대 선배님께서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사랑하는 후배들을 위해서 거금 300만 원에 해당하는 책을 흔쾌히 기증하기로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8회. 깨엿“언니야, 왜 그려? 학교서 선생님헌티 혼난 거여? 아니믄 또 아부지가 학교 가서 술 먹고 난리 친 거여?”부뚜막 앞에 앉은 언니 눈이 퉁퉁 부었다. 아침에 언니네 학교에 간다고 나간 아버지는 날이 어두워지도록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읍내리에 나갔으니 술집 어딘가에서 고약해져 있을 터였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7회. 소풍여름방학이 돌아오고 밭에는 옥수수가 영그느라 수염이 까맣게 말라갔다. 엄마는 감자나 옥수수를 쪄 솥단지째 마당에 내놓았다. 수박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종종 수박을 서너 통씩 가져오기도 했다. 엄마가 잘 익은 수박에 칼끝을 들이대면 ‘쩌억’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저씨들과 동네 아이들은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6회. 균형비를 맞은 농작물만 몸집을 키운 것은 아니었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고 나도 키가 부쩍 자랐다. 큰비가 내리던 날, 불어난 개울을 건너는 순간 다 커버린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열매들이 나무에서 거의 다 떨어졌다. 낙엽에 파묻힌 열매들은 산짐승들 몫이었다.능바우에는 본격적인 사냥이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5회. 열 살, 물살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트럭이 오지 않았다. 새로 이사 갈 집이 바로 주인집이었기 때문에 짐만 날랐다. 주인집이 시내로 이사를 하면서 안채를 우리에게 내었다. 우리 형제들은 처음으로 부모님과 따로 방을 쓰게 되었다. 아랫방은 부모님, 그 위쪽 미닫이문이 달린 윗방은 우리 남매 방이 되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4회. 여름, 그리고 가을학교 수업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럴수록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내가 돌아갈 곳은 아버지가 있는 집밖에 없었다.집에 가는 내내 나한테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3회. 트라우마꽃 농사만 짓던 아버지는 농사일로 바빴고 엄마는 다시 시장으로 장사를 나갔다. 이제는 병아리가 아니라 강아지를 도매로 사다가 시장에 나가 판다고 했다. 엄마는 아침마다, 우리가 이사 올 때 지나왔던 큰길을 따라 밤실 마을까지 가 버스를 탔다.“엄마는 어트케 식구들 아침밥도 다 챙겨주고 허니라고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2회. 능바우 창꼬방으로재실집 앞으로 펼쳐진 들판이 누렇게 변했다. 올벼를 심은 논은 날 더울 때 추수가 끝나 진작에 텅 비었다. 논두렁을 차지하고 자란 콩대도 벼를 따라 똥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인자 나비 안 좋아허잖여, 새끼 쥐 잡어먹는다고, 아 그람서 왜 나비는 데꼬 갈라고 그리싼데?”“그려도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 01회. 모두의 방 작은오빠랑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녹슨 못을 줍기로 했다. 언니랑 큰오빠는 학교에 갔다. 작은오빠랑 노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지만 할 수 없었다.“오빠, 쩌어기 옥수수, 옥수수.”길바닥에 멀쩡한 옥수수가 떨어져 있었다.“오메, 별로 드럽지도 않은디, 누가 흘리고는 그냥 가버렸나비네. 우리가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7장 The end The end-그건 가슴 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비가 내렸다. 은행잎이 공중으로 휘돌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바닥에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 소리는 서서히 굵어져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들렸다. 나는 루시퍼를 꺼내어 연주했다. 여자가 두고 간 팜플렛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여자의 기획 아이디어는 언제나 빛을 냈다. 구보아저씨 이야기가 핫하게 퍼진 지금 추모공연 기획을 내놓다니. 어제부터 공연을 시작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추모공연을 하게 되면 구보아저씨가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6장 오디션 레트로 가든에 도착하자마자 구보아저씨는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렸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사람 맞아? 나는 크게 물었다. 용주가 없다는 걸 믿지 않는 눈치였다. 말리에게 전화를 걸어 용주가 D시에서 언제 오냐고 물었다. 용주랑 같이 있는데 뭔소리냐고 했다. 예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말리에게 용주와 당장 레트로 가든으로 오라고 했다. 드디어 용주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 온 거다. 용주가 안겨준 엄청난 충격의 여파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구보아저씨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왔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5장 만남 병실에서 만난 구보아저씨는 너무도 멀쩡해서 마치 딴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건강상태는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말리는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라도 대하듯 호들갑을 떨었고 구보아저씨는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온 표정으로 우리를 대했다. “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전쟁터라도 다녀온 거냐?”“어휴 살 만 한가봅니다, 농담까지 하시고. 그런데 아저씨, 범인 얼굴 보셨죠? 얼굴 보면 아시겠어요?” 여자는 당황한 듯 나를 툭 건드렸고 말리는 형 아까 화장실 급하다며? 하고 말을 돌렸다. 그러나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3) 머릿속이 하얘졌다. 빨리 불을 켜야 했다. 전기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열 걸음 가까이 가야 한다. 불을 켜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 놈과 대적하는 게 더 이로울까.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언젠가 놈이 다시 올 거라고 확신했지만 하필 무방비 상태인 지금 나타나다니. 놈과 어떤 식으로 대결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저씨를 그렇게 만들 정도면 함부로 봐선 안 될 상대다. 기선제압을 해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게 관건이다. 실내는 완벽하게 어둠으로 차단된 상태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2) *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넋이 나간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그냥 멍했다. 미로를 간신히 빠져나왔나 싶었는데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것처럼 암담했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강력한 권력과 속박의 권한은 허공에 뜬 나무에서 비롯된 것처럼 근본이 없는 것이었나. 빈 좌석에 앉아 맞은편 유리창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다. 몇 개의 역을 지나쳐 지하철은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빛이 날카롭게 유리를 통과해 오른쪽 눈을 따갑게 찔러댔다. 사람들이 점점 많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1) 이 주가 지났지만 구보아저씨의 의식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저씨의 표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평온했다. 그동안 나는 병원에 면회 가는 날을 제외하곤 레트로 가든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주일도 안 되어 경찰 수사는 흐지부지 넘어가는 눈치였다. 피해자가 의식이 돌아와야 뭔가 밝혀질 텐데 지금으로선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여자는 평소와 달리 병원으로 가는 내내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제는 서로 말이 없어도 어색함을 견디는 관계는 아
에필로그11934년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남시정식의 아내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해가 창호지를 바른 창문에 넘실거렸다. 정식은 이불을 덮지 않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벽 쪽에 잠든 듯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요즘은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곤 했다. 평소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맡에 떨어져 있는 손바닥만 한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오래전부터 남편이 지니고 다니던 생아편이 떠올랐다. 순사보에게 두드려맞은 이후 진통제로 복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 낫고도 궂은날엔 뼈가 수
6장이별4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집안은 어둠과 적막에 휩싸였다. 할아버지가 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던 사랑채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허청 처마 밑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장작 더미도, 그 옆 빈터에 집채만 하게 자리 잡았던 짚 누리도 보이지 않았다. 농사 규모가 현격히 줄었다. 새경을 줄 수 없게 되자 십수 년을 함께 살던 머슴 팔복이도 떠났다.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정식의 두루마기가 바람에 맞서며 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고요를 깨뜨렸다.우두커니 서서 집안을 넘겨보던 정식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할아버지 내외와 부모님에 대한 인사를 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3장 침입자(2) “아저씨, 공연 늦지 않게 오세요. 준비 다 해놓을 테니까요.” 이른 점심을 먹고, 잠깐 어디 들렀다 갈 테니 먼저 가 있으라던 구보아저씨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건을 구하러 간 건 아닌 눈치였다. 대체 어딜 간 걸까. 한 번도 개인적인 일로 공연을 펑크 낸 적은 없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거나 병원에 약을 타러 갈 때는 언제나 나와 동행했고, 물건을 구하러 갈 때도 한나절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지역 복지관의 ‘청춘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