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열음 작가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

07회. 소풍

여름방학이 돌아오고 밭에는 옥수수가 영그느라 수염이 까맣게 말라갔다. 엄마는 감자나 옥수수를 쪄 솥단지째 마당에 내놓았다. 수박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종종 수박을 서너 통씩 가져오기도 했다. 엄마가 잘 익은 수박에 칼끝을 들이대면 ‘쩌억’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저씨들과 동네 아이들은 우리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앉아 밤이 늦도록 자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공사도 멈췄다. 아저씨들은 토방에서 동네 아이들과 공기놀이를 하거나 비닐을 몸에 돌돌 말고 나가 소가 있는 집에 꼴을 베어다 주었다. 아저씨들이 길가에 넘친 물을 따라 나온 미꾸라지나 중고기를 잡아 오면 엄마는 호박을 썰어 넣고 매운탕을 끓였다. 논이나 방죽에 나가 우렁을 한 양동이씩 들고 오면 삶아서 살을 발라 고추장과 빙초산을 넣어 무쳤다. 우렁 초무침은 언제 먹어도 환상이었다.

“하이고 맨날 이르케 반찬도 없이 밥을 디리서 어찌까요잉?”

엄마는 평소 우리가 먹던 것보다 맛있는 것들을 훨씬 많이 해서 상을 차리면서도 빼먹으면 안 되는 반찬처럼 그 말을 꼭 덧붙였다.

“아줌마 그게 먼 소리래요잉, 우덜은 여그 공사가 아주 안 끝났으믄 쓰것고만요. 밥도 맛나고 능바우 아들도 이쁘고요. 돈을 벌러 왔는지 호강허러 왔는지 몰로겄당게요.”

아저씨들은 정말 엄마가 해주는 밥이 맛있는지, 아니면 아버지 말대로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서 그런 건지 툭하면 엄마에게 빈 공기를 내밀면서 밥을 더 달라고 했다. 어떤 아저씨들은 엄마를 자꾸 부르는 게 미안하다고 나를 불러 밥을 더 퍼 오게 했다. 밥을 두 그릇씩 먹고도 아저씨들은 누룽지까지 싹싹 비웠다. 설거짓거리가 많아 힘들 텐데도 수돗가에 앉은 엄마는 자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느그들 포크레인 바가지 타봤냐?”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저씨가 굴착기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얼레, 포크레인 바가지에 사람이 다 탄데요?”

“아, 그럼, 얼마나 재밌는디. 내가 태워 주랴?”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먼저 타겠다고 야단이었다. 아저씨가 다치지 않게 차례로 줄을 서라고 했다. 진주가 일등, 내가 이등이 되었다. 밥을 해주는 엄마 덕분에 우리는 특혜를 누렸다. 큰아이들은 위험하다고 해서 작은오빠는 탈 수 없었다. 나도 커서 안 된다는 것을 꽉 붙잡고 있겠다고 우겨서 겨우 허락받았다. 아저씨는 마당 가에서 웃자란 쑥대를 한 아름 뜯어다 굴착기 삽 안쪽에 깔고 동생을 앉혔다.

“갑자기 일어서면 큰일 난다. 떨어진 게, 가만히 있으얀다잉.”

동생이 끄덕였다. 겁먹은 표정이었다. 아저씨가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는 굴착기 삽을 들어 올렸다. 굴착기가 천천히 돌기 시작하자마자 진주가 무섭다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저씨가 다시 시동을 끄고 서둘러 우는 동생을 내려주었다.

“아무래도 진주는 너무 애기라서 무선가빈디.”

동생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예상했던 것보다 내 차례가 빨리 돌아와 흥분됐다. 나는 아저씨 도움 없이 혼자서 굴착기 삽 안으로 냉큼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흙냄새와 쑥 향이 섞여 기분이 묘했다. 아저씨가 삽을 들어 올려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가 조금 빨리 몇 바퀴를 더 돌리고는 나를 내려주었다. 땅바닥에 내려왔는데도 가슴이 계속 쿵쾅거렸고, 땅이 빙빙 돌았다.

진짜 방학 같던 공사가 끝나고 아저씨들도 마을을 떠났다. 동네 아이들이 당산나무 아래까지 줄지어 배웅했다. 아저씨들과 함께, 옛날이야기도, 맛있는 반찬도, 굴착기 놀이기구도 사라졌다. 아저씨들이 일을 좀 덜 열심히 했더라면 좀 더 길게 우리 사랑방에 머물렀을 텐데 아쉬웠다.

아저씨들이 다 돌아갔는데도 저녁을 먹고 난 아이들은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 놀다가 밤이슬에 종아리를 적시며 돌아갔다. 종종 그대로 잠이 들어 아침에서야 돌아가는 애들도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 형제들도 가끔 사랑방에서 잠을 잤다.

공사로 학교 가는 길이 넓어져 이제는 한 줄로 길게 줄지어 걸을 필요가 없었다. 여자애들 넷이 손을 잡고 옆으로 함께 걸어도 충분했다. 방학이 끝날 때마다 하던 동네 아저씨들 풀베기 행사도 사라졌다. 전에 다니던 길에는 방학 동안 아무도 다니지 않아 개학 때쯤 되면 풀이 우리 허리 높이까지 쑥쑥 자라있어 개학 전에 아저씨들이 낫을 들고 나가 다 베어줘야 했다. 하지만 새로 난 길은 불도저가 여러 번 땅을 다져서 그런지 큰 풀이 없었다. 기대와 달리 버스는 안 다녔다.

산을 깎아 새로 만든 길 아래로는 낭떠러지가 생겨났다. 우리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엉덩이에 붉은 흙을 잔뜩 묻혀가면서 흙 썰매를 타고 내려가, 흙이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경사를 누가 더 빨리 올라가는지 내기했다.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다져지지 않은 흙길에 종아리까지 푹푹 빠트리며 걸어야 했다. 몇 번 신발을 더럽힌 능바우 애들은 비가 오면 망설임 없이 예전의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가을바람이 불었다. 사방에서 낙엽이 날아와 새 길의 맨살을 덮었다. 가을 소풍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새벽마다 뒷산에 올랐다. 밤새 떨어진 알밤을 줍기 위해서였다. 암탉이 낳은 달걀도 차곡차곡 찬장에 들어가 앉았다. 소풍날 가져갈 김밥에도 넣고 삶아서 간식으로 챙겨가려면 달걀이 꽤 필요했다. 가을 소풍 장소는 작년에도 갔던 천호성지였다. 아이들이 농담 삼아 소풍 성지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아이들과 함께 밤이랑 상수리를 주워 집에 돌아왔다. 마침 마당에는 집안 살림들이 비행하고 있었다. 가을일하다가 술을 잔뜩 마신 아버지가 던지기 선수인 건 보나마나였다. 엄마는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옆에서 악을 쓰며 부채질했다. 나는 밤과 상수리가 든 자루를 얼른 뒤뜰에 감추었다. 던질 것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던질만한 물건을 찾지 못한 아버지가 엄마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엄마를 던지기는 너무 무거웠는지 머리를 잡은 채로 흔들고 뺨을 때리고 발로 찼다. 엄마가 순순히 맞아주지 않고 욕을 하며 대드는 바람에 아버지 눈이 뒤집혔다. 마당을 가로지른 아버지가 지게 바작에 꽂힌 낫을 빼 들었다.

“엄마! 빨리 도망가! 언느응!”

언니가 소리 질렀다. 엄마가 달리기 선수가 될 차례였다. 엄마는 대나무 숲을 향해 달렸다. 엄마의 선택은 장애물 달리기였다. 술에 취한 두 번째 주자를 고려한 결정일 터였다.

“아버지이! 아버지이이!”

언니의 응원에 힘입어 아버지는 뒷마당 쪽으로 낫을 바통처럼 들고 뛰었다. 비틀비틀, 형편없는 선수였다. 엄마의 선택은 탁월했다. 대나무 장애물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버지는 몇 개의 대나무에 낫으로 상처를 낼 뿐이었다. 옆집 아저씨가 성큼 쫓아가 아버지한테서 바통을 빼앗았다. 아버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집 안으로 들어가 이미 부서진 물건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던지기 시합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단연 일등이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도 아무런 상이 주어지지 않자 아버지는 욕을 쏟아내다 지쳐 곯아떨어졌다. 겁에 질려 벌벌 떨던 나도 어느샌가 잠들었다. 잠결에 언니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침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니가 차려준 아침상을 말없이 받았다. 우리도 조용히 밥을 먹고 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갔다.

‘내일이 소풍인데 그때까지 엄마가 안 돌아오면 어쩌지. 우리 반에서 나 혼자 김밥도 못 싸가면 어쩌지. 앞으로 영영 엄마가 없으면 어쩌지…….’

수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마라톤을 하다시피 달려 집으로 왔다. 엄마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장에 갔나? 하긴 내일이 소풍인데 김밥 싸주려고 장 보러 갔겠지.’

김밥 재료를 사러 엄마가 시장까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 다들 중학생인 자녀에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중학생이 없는 집에서도 다른 집 학생에게 부탁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설마……. 나는 저녁 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빨리 마을 입구에 나타나길 기다렸다. 작은오빠도 구슬치기하러 나가지도 않고 마당에 서서 자꾸만 동구 밖을 내다봤다. 멀리 걸어오는 사람들 사이로 언니 모습이 나타났다. 오빠와 나는 달렸다.

“언니야, 엄마는?”

“엄마 안 올 거여.”

“…….”

오늘만 안 온다는 것인지, 앞으로 계속 안 온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겁났다. 말 대신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야들아 사실은 어짓밤에 엄마 왔었어. 먼 소리가 나서 혹시나 싶어 창꼬방이 가본 게 엄마가 농약병 들고 울고 있드라. 내가 안 봤으믄 우리 엄마 죽을 뻔 혔으야. 내가 차라리 도망가라고 혔어. 외할머니한테 가라고. 죽지만 말라고. 엄마가 오천 원 주고 가면서 당분간 차비허라고, 나보고 불쌍헌 니네들 잘 돌보라고…….”

산 너머로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민주 너는 이거 입고 가라. 내가 찢어진 디 어짓밤이 꼬메 놨어. 그리고 도시락 가지가고. 엄마가 언지 올랑가 몰라서 김밥 재료는 못 샀어. 차비가 있으야 학교를 댕긴 게. 나도 중학교 졸업은 히얄 거 아니다냐. 참말로 미안허다.”

소풍날 아침 자기가 입던 원피스와 도시락 가방을 내미는 언니는 죄인의 표정이었다. 길 잃은 죄가 주인을 잘못 찾은 듯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았다. 흰밥에 깍둑썬 오이와 고추장.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쪄놓았는지 도시락 가방 구석에 시커멓게 들어앉은 밤 한 움큼.

아이들 사이에 섞여 학교로 가는 내내 오빠랑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고 집을 나갔다는 소문이 동네를 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학년별로 운동장에 모여서 천호성지까지 걸어갔다. 몇몇 엄마들이 선생님들에게 줄 음식 찬합 보따리를 들고 따라왔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은 온통 잠자리 떼 차지였다.

“민주야, 이거 마셔. 애들이 돈 모아서 너랑 니네 오빠 꺼도 샀어야.”

경자 언니가 다가와 뚜껑이 열린 오란씨 한 병을 내밀었다. 빨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이따가 점심때도 능바우 애들 다 모여서 김밥 나눠 먹기로 혔응게 걱정허지 말어, 알겄지?”

내가 얼떨결에 오란씨 병을 건네받자 경자 언니는 사과 하나를 내 도시락 가방에 넣고는 자기네 반 무리로 돌아갔다. 나는 오란씨를 받아 들고 아주 조금씩 음료수를 빨아 먹었다. 병은 좀처럼 비워지지 않았다. 오란씨가 너무 달아서 이번엔 내가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뚜껑이 없어 계속 손에 들고 걸어야 하는 벌. 엄마는 집을 나갔는데 단물이나 쪽쪽 빨아먹고, 친구들 사이에 앉아 오이 고추장 도시락 먹을 걱정이나 했던 내가 받는 벌.

천호성지에 도착하니 순교자들의 무덤 위로 누렇게 잔디가 바랬다. 비석 틈새, 무덤 사이, 잔디 중간중간에 숨겨놓은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보물을 찾을 마음이 없어 먼 산을 보고 앉았다. 천호산을 온통 다 뒤져도 내가 찾는 보물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엉덩이에 달라붙은 검불을 털고 일어서는데 누군가 다가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는 뛰어갔다. 종이쪽지였다. 펼쳐보았다. ‘보물’이라고 보라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엄마 얼굴에 자리 잡았을 보라색 멍 자국 같았다. 구겨서 힘껏 던졌다. 보물은 얼마 못 가 바로 앞 가시덤불에 걸렸다.

“아이고, 애들 소풍 갈직이 천 원씩이라도 주지 그맀냐. 소풍날 챙기 주라고 오천 원 준 건디.”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내가 소풍에 오이 고추장 도시락을 싸갔다고 말하자 엄마가 언니를 나무랐다.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엄마, 나는 암시랑토 안혔어. 애들이 김밥도 주고 오란씨도 사주고 사과도 줬당게. 참말로 암시랑토 안혔당게.”

‘그니까 엄마도 암시랑토 안혔으면 좋겄어’라는 말은 삼켰다. 아버지는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고 저녁마다 부서진 물건들을 하나씩 고쳤다. 들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현대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